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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명: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사건 아카이브 2025. 6. 2. 17:20반응형
2003년 2월 18일, 화요일. 아침 9시 53분.
중앙로역 플랫폼에 정차한 전동차 안은 여느 출근길처럼 평범했다. 이어폰을 꽂은 대학생, 유모차를 앞에 둔 젊은 엄마, 손에 가방을 꼭 쥐고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까지. 서로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의 하루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1-1칸 구석, 말없이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바닥에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기름이 담긴 두 개의 페트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뚜껑을 열었고, 액체는 좌석 사이 바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몇 초 후, 성냥 하나에 불이 붙었다.
— 치익.
그 소리는 작았지만, 불꽃은 너무도 빨랐다. 휘발유는 순식간에 열차 안으로 번졌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검은 연기에 눈을 떴다. 누군가는 뛰쳐나가려 했고, 누군가는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차는 수동 운전 모드였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지 않는 구조. 비상 시에도 문은 사람이 직접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그러나 연기에 휩싸인 내부에서 그 작은 버튼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관사는 불길을 확인한 뒤, 안내방송 없이 혼자 탈출했다.
뒤늦게 역에 진입한 1080호 열차는 상황을 모르고 멈췄다. 전동차 두 대가 불길에 휩싸이자 피해는 두 배가 되었다. 연기와 열기는 서로를 집어삼켰고, 화염은 통로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은 창문을 두드렸다. 누군가는 옷을 벗어 입을 틀어막았고, 누군가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비명을 질렀다. 다급한 손가락이 휴대폰 자판 위를 맴돌았다.
아래는 당시 실제로 전송되었거나 수신된 마지막 문자 메시지들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 피해자들이 가족과 연인에게 남긴 이 기록들은 지금도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미안하다. 가방이랑 신발 못 전하겟어 돈가스도 해주려고 했는데... 미안.. 내 딸아. 사랑한다.”
“불이 났어. 나 먼저 하늘나라 간다.”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커야 해. 아빠가 미안해.”
“오늘 아침에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자기야. 사랑해. 영원히."
“기다리지 마.”그리고, 한 연인은 이런 문자를 받았다고 전했다.
“ㅋㅋㅋㅋㅋ기다리지마ㅋㅋ안 갈거야ㅋㅋ너 질렸어ㅋㅋㅋㅋㅋㅋㅋ뿡뿡뿡”
처음엔 싸우자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지 않게 하려는 마지막 배려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이 문자들은 실제로 전송되었고, 일부는 통신 기록으로 남았다. 어떤 것은 끝내 전송되지 못했고, 어떤 것은 마지막으로 수신된 이후 연락이 끊겼다. 그 말들은 아직도, 사건의 기록 속에서 불씨처럼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태우고 있다.
극적인 탈출도 있었다. 한 남성은 탈출구를 찾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보고 몸을 던졌다. 화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채로 구조대에 발견되었지만, 그는 살았다. 또 다른 한 무리는 서로 손을 잡고 지하철 틈을 기어 나와 철로 위를 따라 걸었다. 그들의 다리는 불에 그슬렸고, 눈은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행운을 갖지 못했다.
구조대는 신고 접수 후 5분 만에 도착했지만, 현장 진입은 쉽지 않았다.
지하 공간은 유독가스와 고열로 뒤덮여 있었고, 소방관들의 산소통도 급속히 떨어졌다. 화염은 출입구를 막고 있었으며, 구조요청은 쏟아졌지만 정확한 위치 파악조차 어려웠다. 소방 무전기가 작동하지 않아 현장 대응도 엉켰다.한 구조대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건 알았지만, 들어가려면 우리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유족들의 분노는 곧바로 터져 나왔다.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느냐”며 울부짖는 목소리는 대구 전역을 울렸다. 기차가 왜 자동으로 문을 열지 못했는지, 기관사는 왜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도망쳤는지, 그리고 왜 구조대는 그렇게 늦게 대응했는지, 수많은 질문이 던져졌다.이에 대해 정부는 사건 사흘 뒤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전면적인 시스템 점검과 개혁을 약속드립니다.”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다.
열차 안에는 매뉴얼이 없었고, 방송은 먹통이었다. 열차 자체에 방염 처리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검게 타버린 철제 프레임만이 사람들의 자리를 대신했다.
192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은 질식사였다. 열기로 인한 손상보다 연기가 더 빨랐다. 의자 아래로 엎드려 있던 시신도, 서로 부둥켜안은 채 발견된 가족도 있었다.
사건 이후, 방염 소재가 도입되고 문은 자동으로 열리게 바뀌었다. 매뉴얼도 생기고 훈련도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지만 21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묻는다.
“정말 바뀐 게 있긴 한가요?”
기술은 진보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도생’이었다. 방송은 늦었고,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마치 반복되는 악몽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대구의 불길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2025년 5월,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또 한 번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이 사건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언론은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불이 크게 번지지 않은 이유는 2003년 대구 참사 이후, 모든 전동차 좌석과 내부 마감재를 난연(難燃) 재질로 전면 교체했기 때문입니다.”당시의 참사는, 단지 상처로 남지 않았다.
그날을 기억하고, 고통을 기록하며, 우리는 제도를 바꿨고 시스템을 정비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21년 뒤,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냈다.그래서 우리는 이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플랫폼, 차창 너머 풍경, 한순간의 정적 속에서 — 그날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아리친다.
불은 꺼졌지만, 기억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2003년 대구의 그날, 192명이 남긴 기록은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안전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2025년 5월, 서울 지하철 방화 사건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말해준다.
기억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
그날 아침, 지하철 1호선 안에 타고 있던 모두가 당신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도 잊지 않기를.
그날 목숨을 잃은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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